12 - 5, Le monde de Roseta De Mignon Poisson
"…별명은 너무 가깝게 느껴지지 않나? 이름과 관계없다면 더더욱."
"거리감은 본인이 정하는 거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자주적으로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소리지 뭐겠냐."
"으음, 메이플?"
"메이플?" …
*BGM
쳐낼 기회가 조금쯤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은 글과 달라서 일단 태어나면 끝이다. 지워내거나 교열할 수 없다. 잘 적어 내밀 수 있는 글과 그 순간에 토해내면 그만인 말은 몸짓으로 따지자면 악수와 따귀만큼 다르다. 살카이안은 생각했다. 이 녀석은 그런 비유를 안 좋아하겠지.
"그럼 전자를 고를래요!"
"그래, 에핀."
"에핀? 이렇게 지은 이유도 알려주실 건가요? 저 궁금해요!"
"가시라는 뜻이야. 이리저리 써. 장미 가시라거나, 생선 가시라거나. 가시나무를 말할 때도 쓰고."
그럼 어쨌거나 나무라는 것도 네가 붙여 준 메이플과 겹치잖아. 그래... 에핀. 또 불러 봐. 내 이름. 네, 메이플. 저는 여기에 있답니다? 환장하겠네. 내가 왜 그랬지. 의미를 이중 삼중으로 얹어올린 이름에는 아직도 걷어낼 것이 남아 있었다. 살카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플?"
"아, 좀. 그래 에핀, 난 생각할 게 있어서 잠깐 혼자 있어야겠어."
빠른 걸음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바이올린 케이스가 뼈마디 위로 달캉거렸다. 살카이안은 그가 따라오고 있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애써 떨어트려 놓으려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저리 꺼져,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견디기 어려운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나 있잖아, 친구한테 약해. 이름에 약하고, 목소리에 약해. 그걸 스스로도 알았다. 스스로 몇 번이고 되뇌인 생각은 말과 그리 다르지 않게 가슴에 새겨진다. 찢어다가 내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걸 잊으려면 더는 말하지 않는 도리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고, 가까이 가지 않고, 근처에 두지 않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세계는 좁아질 텐데, 마법사란 그 테두리를 따라 등을 보이는 이들이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 그 등조차도 보지 못할 것이다. 이별은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도 없이 향기처럼 다가올 것이다. 돌아보면 그 자리에는 다 타버린 이파리만 까맣게 남아서 바람 불면 흩어질 테다. 마법사 친구 같은 건 없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함께 마법사가 되어 버리면 그만이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삶은 바라는 것을 딱 한 줌만 쥐여 주지 않는다. 이걸 갖고 저걸 놓으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다. 영혼에게 가장 강한 것은 세계이고, 그 세계는 강한 만큼 단순하거나 다정하게 굴어 주지 않는다.
너는 우리가 정한 신호라는 것이 어떻게 서로를 매어두는지 알아? 그 양극단에 올려진 추의 무게가 다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아? 세계는 기댈 곳을 잃고 휘청이다가 어디론가 헤매기 시작해, 너무 가벼운 오뚝이가 그런 것처럼.
등 뒤의 땅에서 엇박이 이어졌다. 빠르고 가벼운, 하지만 실은 주의깊지 않으면 낼 수 없는 소리다. 살카이안은 그걸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대화가 한창일 때 뛰쳐나오면 상대가 어쩌는지는 감당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떨쳐내기에는 무슨 표정을 지어 보일지 몰라서, 이름을 준 상대에게 매몰찬 얼굴을 보이기는 싫으니까. 그건 에핀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찔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쪽이 물러설 겨를도 없이 이름을 내리꽂은 녀석이 또 무슨 태도를 보이는지 알 게 뭔가. 아, 이 녀석은 이런 표현을 안 좋아하겠지...
혼자 있고 싶다던 주제에 앉을 데라고는 없는 곳까지 걸었다. 살카이안은 호제타가 이제 따라오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더는 들지 않을 때까지 앞만 노려보며 걸었다.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당장 시작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그렇게 자리를 박차지도 않았을 테니까.
멈춘 곳은 마구간이었다. 깔끔하기는 해도 고상함이나 우아함이 감돌지는 않을 게 뻔한 축사를 왼쪽에 끼고 몇 걸음 더 걸어가서 찾은 곳이라는 게 기껏해야 쓰지 않는 빈 천장 아래였다. 바이올린을 꺼내 안쪽으로 돌려 쥐었다. 활을 꺼내며 케이스는 짚 위로 내던졌다. 깨끗한 먼지가 훅 흩어지면 뒤를 돌았다. 오른손을 쭉 끌어당겨 올리면 소리보다도 떨림이 먼저 달렸다. 가락의 시작으로 흔하지 않은 높은 음이 가장 곧을 때. 핏빛 눈동자를 찾고서, 살카이안은 곧장 눈을 감아버렸다. 손님을 맞을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네가 따라온 거잖아. 그런 생각보다도 눈꺼풀 아래로 손이 움직이는 게 빨랐다. 첫 음은 썩 어설프지는 않았다. 열두 살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후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을 듯할 만큼 훌륭하다고도 해줄 만 했다. 그러나 기교를 쥔 연주는 아니었다.
길쭉하게 얇은 스트로크로 한달음에 치고 올라가서 절반쯤 후퇴한다. 매끄러운 시작을 끊었는데도 거친 직선을 지난 활이 현을 긁어낸다. 감은 미간이 불편하게 움츠러든다. 또 몇 번. 통제 아래의 음이 가장 힘겨운 원성을 지를 때 살카이안은 입안에서부터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활과 어깨, 입술이 함께 떨리는 동안 숨을 고른다. 이 소리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악기와 연주자가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듯한 상황이 조금 이어지고 나면 살카이안은 활을 활으로 다루는 걸 포기해 버린다. 힘을 풀고, 통제를 놓고, 네게 무엇을 바라든 가장 어울리는 작품은 만들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그제서야 가쁜 호흡이 사라진다. 입술이 미약하게 벌어지고 손가락이 가벼워지면 도리어 속주가 트인다.
투박하고 뚝뚝 끊기는 음이 오고가는 동안 표정과 호흡이 하나가 된다. 그러면 겨우 연주는 음악이 된다. 아무리 짧은 숨이라도 처음과 끝이 있다. 리에종liaison은 홀로는 발음되지 않는 소리다. 입을 빌어 하지 못하는 말, 남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겨누어서 좋을 것이 아닌 말들이 여러 줄 휘갈겨진다. 하지만 줄이면 이렇다. 그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 오후의 볕 그늘 한켠에서 흩어질 뿐인 말들은 연주자가 차분한 눈을 떠 초대받지 않은 관객을 바라볼 때까지 이어진다.
시간이 끌어당기는 길에는 뭉근한 고통이 있다. 살카이안의 지난 생, 호제타는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에핀은 이곳에 있다. 가장 강한 세계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사람은 아는 것만으로도 어떻게든 끼워넣는다. 해석될 수 있는 갈래가 그렇게 뻗어나갈 것이다. 손님은 마실 수 없는 것을 청도 없이 내밀어 본들 그걸 좋은 대접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세계의 주인은 언제고 한 사람뿐이다. 여기 그 주인에게는 너무도 당연해서 어쩌면 설정조차 되지 못할, 아무것도 아닌 사실이 한 줄 있다. 살카이안 리에종 블랑드렌 클라셰트는 왼손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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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연주라기에는 스타일이 다르니 BGM취급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