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Possession
이전 생에 대하여
클라셰트
클라셰트 대공가의 사람들은 로존딘 유일의 귀족으로 남아 있음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함께 느끼는 이들입니다. 혁명 당시 대공가가 직접 처형하거나 권리를 박탈한 귀족들 중에는 가까운 벗이나 출가외인도 포함되어 있었을 텝니다. 대공가는 언제나 선했고 그들의 벗들 또한 억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클라셰트가 살아남은 것은 정말이지 정치적인 이유 덕이었을 것이고 클라셰트의 사람들 또한 그것을 잘 압니다. 달크루아에 남을 수 있었던 유일하다시피 한 권세가 집안이 된 그들은 정말로 사용되었던 단두대 앞에서, 무엇보다 스스로의 앞에서 의연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클라셰트의 사람들은 그냥 진짜 선해지기로 했습니다. 주어진 것을 가장 좋게 쓰기로 했습니다.
볕이 기승을 부리려면 시간이 넉넉한 6월 초입이었다. 로존딘의, 그 중에서도 달크루아의 여름은 온도보다는 바람으로 찾아오고는 했다. 살카이안에게는 그랬다. 한참이나 마차를 달리는 동안 차창 안에서 맛볼 수 있는 경치가 바람이었고, 강을 건너는 동안 돌길 위에서 다각거리는 말편자 소리도 바람이었다. 편차가 들쑥날쑥한 각양각색의 연주가 번갈아 들려올 때쯤 눈을 감으면, 한없이 가벼운 것처럼, 가만히 앉아서도 얼마간 흔들리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고는 했다. 그렇게 문을 열고 중앙동 앞의 정원을 내려디디면 그때가 비로소 6월의 시작이었다. 열린 창문 안쪽의 2서재는 선선하고 평화로웠다.
"아무튼 이 나라 사람들은 얼굴만 얌전해서는 말이 너무 많아."
"그걸 다 모아 놓으라고 시킨 게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평을 하는구나?"
"누군지 몰라도 그놈만 없었으면 이 무더기가 통째로 알 바가 아니었겠지…."
불퉁하게 대꾸한 살카이안이 수북하게 쌓인 약 반 년치의 일간지 틈으로 손을 움직였다. 《북동부 마레 퐁텐에 때이른 관광 인파 몰려》《대륙적 전체주의를 경계하는 추천도서 20선》… 빠르게 훑던 눈이 아무것도 아닌 사설 하나에 멈췄다. 곧 한 부를 집어들고 물었다.
"벌써 달크루아에 인구가 늘었어?"
"솔직히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약간은. 하지만 지방 부호들보다는 수도 인근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 같다고 봐야겠지. 클레드랑데에 가서 확인하면 알려줄걸."
클레드랑데는 달크루아의 베일 안쪽에 위치한 수도의 관문 중 하나로, 마차 여러 대가 마주 엇갈려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널찍한 돌길이 강을 내려다보며 길게 이어지는 덕에 짐이 많은 여행의 통행로로는 인기가 좋았다. 살카이안은 누이의 짓궂은 눈빛을 마주하는 일도 없이 이번에는 3월 중순의 열 부를 추려 손에 들었다.
"마법 한두 개쯤 보여주면서 이름을 댈 마음이 들면 가 볼게."
"어리숙하기는."
"……."
그냥 꼬마인 나한테 퍽이나 알려주겠다. 없는 특권 남용하려다 쫓겨나지나 말렴. 대충 그런 응수가 지나갔다. 이런 일이 몇 번쯤 있고 났더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라셰트의 차녀이자 살카이안의 작은누나인 르네앙드는 그와 일곱 살 터울로 올해 스물세 살이었다. 이번 생에서 쌓은 열여섯 해를 더하지 않더라도 사실은 살카이안보다 더 어렸다. 들으면 알 수 있는 이야기인데 왜 혼자서는 깨닫지 못하는지. 더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살카이안은 신문 뭉텅이를 도로 쌓아 둔 다음 창가에 기대 섰다. 사실 나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 번의 경험이 있었는데도 제대로 써먹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래서 마음이 썩은 사과처럼 푹 패였다. 죽고 살아 온 게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잊을만하면 빼꼼빼꼼 고개를 들었다. 창가로 초여름 바람이 야속하게 상쾌했다.
"내가 너무 게으르게 살았을까?"
죽어 마땅할 것처럼 사치스럽게 살았으니까 죽어서도 영원히 철 들 일이 없고 내 자리 하나 읽을 줄 모르는 걸까?
"…까불지 마, 동생."
"내가 뭘?"
"괜히 무리하다가 또 쓰러졌다는 소식 편지로 듣게 만들지 말고, 나나 틸리네트한테 맡기라고."
넌 아직 애잖아. 큰 다음에 열심히 해. 지금은 학교 다니는 게 일이야. 열여덟 지나고서 덤비면 얼마든지 인정해 줄게. 다음 내용이 굳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귀로 듣지 않아도 이미 익숙한 말이었다. 살카이안은 바깥을 내다보려는 것처럼 창틀 앞을 양손으로 짚고 등을 돌렸다. 다 거짓말이다. 덤비고 싶어지면 이미 때는 늦었을 것이다. 설득도 회유도 먹히지 않고 칠 년과 구 년을 훌쩍 넘는 어떤 시간만이 두 사람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릴 것이다. 귀기울여 마땅한 사람의 말밖에는 듣지 않을 거면서, 언제까지고 기다려 주고 어울려 줄 것처럼 마음놓고 누리라니 듣기 달콤한 말도 정도가 있다.
마법의 힘이 절실했던 적이 있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나갔던 시간을 되돌리고 피를 헤집어서라도 마법사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살카이안은 그 시절을 기억한다. 로존딘의 독립성에 사지로 몰리고 잊혀지는 사람이 앞으로는 숱하게 나올 거야. 원성이 저 성벽만큼 드높게 오르고는 해일처럼 달려올 거야. 누나는 그걸 받아 삼키려 하다가 기어이는 목이 죄어 오는 것도 모르고서 암초 너머로 손을 내밀려고 할 거야. 파도를 등지고 뛰는 길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것 하나를 인정할 줄 몰라서.
"언제는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고 그래? 나에 대한 건 내가 가장 잘 알아."
저질러 보고 났더니 알 수 있었다. 살카이안은 이제 자신 또한 틀림없이 클라셰트라는 네 음절짜리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안다. 제게도 저만한 동생이 있었다면 아마 같은 말을 했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살카이안 리에종 블랑드렌 클라셰트가 죽었던 날에 필요했던 건 마법 혹은 권력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바랐던 것과 그에게 주어졌던 것은 한 번도 로존딘 대공국민으로서 바람직한 것이었던 역사가 없었다. 더한 사랑으로 간청할 수 있었을 리 없다. 그 이상일 수 없을 만큼 사랑했으니까. 더한 현명함을 가질 수 있었을 리 없다. 클라셰트에는 마법사가 없었으니까. 나는 세계를 구하려던 게 아니라, 나는 그냥 같이, 같이…. 같이 어쩌고 싶었더라….
그렇게나 소중했는데 언제부터인지 함께했던 휴일 하루가 기억에 없었다. 단 하루, 별것도 아닌 딱 하루조차 떠올릴 수가 없었다. 우리가 전혀 함께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 거야. 나 분명히 축제에 갔었어. 혼자 돌아올 줄 몰랐어. 그러니까 부드러운 손을 잡은 채 지칠 줄 모르고 뛰다가 내 몫까지 발 아픈 그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돌아왔을 거야. 그게 누구였더라, 누구일 수밖에 없었더라.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카이안은 창을 닫았다. 기억은 사라지고 바람은 멎는데, 왜 온기와 향기는 가슴에 못처럼 박혀서 영영 녹을 것 같지조차 않은지.
살카이안은 웃으며 신문 무더기를 챙겨들었다. 단어 그대로 죽어버릴 만큼 말이 통하지 않던 르네앙드가 머릿속에서 물었다. 네가 가진 무엇으로 대공이 될 건데? 대공이 되고 나면 뭘 어떻게 해서 너를 살릴 거니?
그는 서른다섯의 르네앙드에게 대답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마법의 문장이 새겨진다.
그래도 나는 마법사가 아니야. 나는 이별의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다.
눈앞에 축복처럼 주어진 눈부신 돌길이 그에게도 보인다. 그 길은 돌아오지 못할 고행길이 되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하지만, 길 따위가 없더라도 한참은 더 뛸 수 있다고 말하면 앞이 보이는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날 했던 말이 당신의 마음에 닿았을까
똑똑하지 못한 나의 최선의
말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법이라고는 모르는 당신의
벽을 부수고 싶어
나만의 문이 가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