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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살카이안은 기꺼이 내주거나 달갑게 믿는 사람이 못 되었고, 도박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의 판돈은 존재의 일부였다. 루-안느가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그때까지의 자신을 일부분 잃어버릴 터였다. 팔 년 전 문제의 소문을 만든 기적이 일어났을 때 루-안느도 그곳에 있었다. 따라서 살카이안은 오롯하게 루-안느의 불안을 믿고 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 아주 없었느냐 한다면 분명 거짓이겠지만. 뛰어내리며 눈을 감지 않은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최악이 딱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죽음과는 달랐다. 이게 협박이든 애원이든 될 수 있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여서는 안 됐다. 너도 어쩌면 그걸 알겠지. 내게 가장 당연해야만 하는 철칙을 너도 알지도 모르지.

뜬눈으로 발 아래가 비어 버리고 나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이었다. 그래, 이건 확실히, 아니 어쩌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대답으로는 부족하겠다고, 살카이안은 생각했다.

곧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풍경이 느렸다. 그렇게 유리컵처럼 떨어져내려서 산산조각이 날까? 생각할 시간조차 없지 않을까, 기대하거나 판단하거나 한 마디를 남길 시간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렇지는 않았다. 팔다리는 민들레 홀씨고 심장은 납을 두른 것처럼 몸보다는 마음이 아래로 꺼지고 내려앉는 게 빨랐다. 그래도 부딪히지 않는 동안에는 충격도 없어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살카이안?"

목소리가 등 뒤로 한 발 늦게 따라왔다. 돌아보지 않고서도 무슨 결론이 났는지 알았다. 그래도 그렇게 부를 거라면 그런 목소리는 약간 반칙이지. 그 당연스럽고 슬픈 부조화가 현실을 들이밀었다. 거센 바람이 분명하게 귓가를 때리는데 세상은 적막했다. 신호 한 번이 없어도 마냥 그대로였으면 했던 무언가는 존재조차 장담할 수 없는 날에 사라져 버렸고, 함께하는 일도 없었던 18세의 겨울은 그럼에도 퍽 달라진 채 그냥 흐르고 있었다. 살카이안이 유년기의 어떤 날들을 되짚으려 하면 생각은 이끌지 않아도 혼자 달리다가 촛불처럼 한순간에 꺼져 버리고는 했다. 네가 만약 나를 기다렸다면, 네가 만약 나를 찾았다면. 네가 만약 나를 원망한다면, 기억한다면.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닌 의문은 작고 눈부시게 타올랐다가 예고도 양해도 없이, 답이 아닌 연기만 남기고 꺼져 버리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다시 한 번 우리가 서로에게 당연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 같아. 쫓지 않았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그러는 사이에도 두 번째 시간이 지나고 지났으며 따져 물을 자격은 처음부터 있었던 적 없었다.

살카이안은 세계의 이치보다도 당연한 이야기를 목 안쪽으로 삼켰다. 이안으로 불린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제 어디에서도 읽힐 수 없어도, 또 만약, 살카이안이 단 한 사람에게만은 목줄을 내준대도, 그 어떤 실패한 선택으로 머무를 길이 바뀌더라도, 나는 언제나 내 자리에 나로서 무사할 것이라고. 나는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떠나지 못하니 네가 돌아올 거라 마냥 믿고만 싶었던 것 같다. 살카이안은 바람도 없이 천천히 멈춘 것처럼 땅 위에 내려섰다. 탁, 아무것도 아닌 소리와 함께 신발 바닥이 닿고서야 마법사의 가슴에서 납이 동그랗게 조여드는 느낌이 났다.

네가 이렇게는 살지 못한다는 이유를 이제 조금쯤은 알 것만 같다.

살카이안은 두 번의 멍청했던 기적을 되짚으며 아파한 적은 있었지만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이 의문은, 이 욕심은 어쩌면 저항할 수 없는 종류였고 몸이나 운명을 내걸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는 땅에 바로 서서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떨어트렸다가 머지않아 루-안느를 올려다보았다. 째깍, 째깍, 발 닿는 곳으로 그보다는 높은 곳이 없어서, 도망친다는 곳이 겨우, 하필이면 시계탑이냐. 바보 같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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