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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이 가득한 방은 클라셰트 저택의 것처럼 크지 않았다. 처음 제 방을 가졌다고 기뻐하는 아이도 드물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들을 기쁘게 만든 이 황립학교 기숙사의 일인실은 사실 짐을 모조리 빼더라도 어느 부잣집 막내 도련님의 방보다 작았다. 그렇다고 썩 좁으냐면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마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스무 개 남짓의 빈 방을 만들자니 이 정도가 최선이었던 것이었겠지만. 혹은 글쎄, 선생은 그렇게 말했지만 본래도 학술과와 검술과에 따라 구색을 맞출 생각으로 남는 방이 더 좁게나마 두 다스를 넘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 한 개로는 역부족인 조명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살카이안은 열어 두었던 창을 닫았다. 그러자 방 안을 뒹구는 풀잎 조각들이며 곤충 다리 같은 것이 본래 있었는지 붙어 왔는지 날아왔는지 따질래야 따질 수 없게 되었다. 한 명 있었는지 없었는지 솔직히 알 바도 아니었던 마법사가 빈 방들을 쾌적하게 생각했을지 을씨년스럽게 느꼈을지도 구태여 상상하지 않고서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우습지 않나, 기적처럼 돌아온 세계에서 우연찮게 마련된 스물네 명은. 너무 깔끔하지 않나, 언젠가는 채워질 듯이 번듯하게 예비된 스물네 칸은.

  살카이안 클라셰트는 이미 어딘가에서 마법사다. 남이 아무리 당연하다 한들 받아 삼키지 않으면 피륙 아닌 것을 자신이라 부르지는 않고, 스스로 얼마나 맞다고 한들 남이 그렇다 해 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불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는 이 년 남짓의 시간 동안 한 번도 긍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살카이안 클라셰트는 정말로 마법사가 될 테니까. 남이 부르고 제가 긍정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테니까. 버젓이 존재하는 것은 바뀔 수도 깨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전에 이름받은 몫을 확실하게 지불하게 된다. 살카이안이 아는 진리는 그렇다. 멍청하고 똑똑하게도 하필이면 그것이 살카이안을 마법사로 만들었다. 살카이안 클라셰트에게 그것만큼은 의심할 도리 없는 생의 섭리다. 마법이란 놈의 존재보다도 그 거미줄이 더 촘촘하고 끈끈해서, 말과 언어를 찢어발겨 아무렇게나 붙이는 쪽이 그럴듯해 보일 지경이었다. 누가 마법사래? 너네 마법사냐? 그러시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세계가 소란스럽고 혼란하고 소름끼치게 조용했다. 그냥 몇 걸음 걸었다고 그런데, 그렇게 뭐든 바뀔 수 있을 것처럼 짜여 있으면서 사실 세계에서 발 딛을 수 없는 곳은 수없이 많다. 아주 예쁘고 반짝거리는 곳은 디디면 죽는 발판인 법이다. 그러니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은 따져 물을 것도 없음이고.

  이불을 대충 털고, 먼지가 얼마나 춤추는지도 눈을 주지 않고, 살카이안은 자리에 누웠다. 언제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초 덮개의 줄이 침대 프레임 위에 놓여 있었다. 불이 꺼지고 십오 초 동안은 같은 세계다. 그는 그 십오 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깨달았다. 향이 다르고, 감촉이 다르고, 눈을 감아도 별 수 없이 느껴지는 추위가 있다. 고집 센 놈들은 다 멍청이들이야. 살카이안은 남일 같은 문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나 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 없이 자리에 파고들었다. 바삭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시트는 부드럽고, 베개는 딱 좋았다. 그런 위화감을 느끼고 났더니 난로를 쓸쓸하게 둔 것이 더더욱 후회되지 않았다. 이대로 하룻밤 자고 나면 전날의 자신을 저주하든지 현실의 끔찍함을 저주하든지 하면서 엄청나게 집에 가고 싶어지겠지?

  살카이안은 저를 애늙은이라느니 스물여덟 살이라느니 하던 면면을 여럿 떠올렸지만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나긋한 미소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기를 거치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늘었다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너네가 아는 애늙은이는 이런 멍청한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냐? 이게 왜 고집이냐면, 그러니까... 내일 아침의 살카이안 클라셰트가 어느 쪽을 저주하게 되는지, 나 스스로도 짐작 가는 데가 있지 않겠어?

  소리를 켜고 싶었다. 손은 물론이고 발목 아래로도 감각이 시원찮았다. 게다가 한밤이었다. 살카이안은 바이올린을 꺼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적어내린다면 한 바닥은 우습게 넘을 만큼 멍청해진 기분이었다. 작은 바람소리가 창 바깥으로도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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