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생에 대하여
ㅤ살카이안
ㅤ전생의 살카이안은 마찬가지로 막내로 태어나 책임과는 크게 연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의 살카이안은 형제들이 왜 그리 로존딘에 진심인지 별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귀찮기만 한 책임을 왜 나서서 지려 하는지, 누릴 것 투성이인 로존딘의 가장 풍족한 집안 중 하나에서 태어났으면서 삶을 왜 잿빛으로 보내려는 것처럼 딱딱하게 구는지 몰랐습니다.
ㅤ상징성 유지가 클라셰트의 유일의 의무가 되었다면, 최소한의 도덕윤리만 지키며 조용하고 부유하게 살면 안 되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굴다가 정 맞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전생의 살카이안은 제 형제들의 몫까지 받아가려는 것처럼 풍요롭게 지냈습니다. 악기는 혼자 오케스트라도 꾸릴 수 있을 만큼 닥치는 대로 손에 쥐어 보고, 책을 실컷 읽고 글도 마음 가는 대로 쓰고 그림도 그렸으며 아무 곳에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말은 이랬습니다. “질서를 수호하려는 클라셰트가 둘이나 있는데 제 몸 던져 예술과 향락을 좇는 클라셰트가 하나는 있어야 균형이 잡히지 않겠어?” …(중략)… 그는 어딘가 공허한 탕아로 지냈고, 그러는 사이 결절의 접근은 대륙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ㅤ제일 오래 머문 곳을 집이라고 한다면 황립 마법학교는, 2층 복도 끝자락 한켠의 212호는 달든 쓰든 육 년간 틀림없이 그의 집이었다. 첫날 풀잎 부스러기와 함께 굴러다니던 소지품들은 절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사라졌는지 달크루아로 가지고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고, 대신 나머지 절반은 새로운 물건이었다. 저보다 남이 필사적이라 결국 제 손으로 관리가 넘어오게 된 라벤더 화분이 2주쯤 물을 안 준대서 죽지 않는다는 걸 안다. 도무지 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래저래 꼬박 매달려 있는 곰돌이 장식은 이제 케이스보다도 반질거렸다. 하지만 가장 다른 것을 단 하나만 꼽는다면 저 책상 위에 압류 예고장처럼 놓인 통지일 테다.
ㅤ그걸 받았을 때 살카이안은 크게 절망하지 않았다. 언제 처음 예상했더라, 열두 살. 열 살,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으로 돌아가서 일곱 살 때였던가, 그것도 아니면 막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즈음이었던가. 그리도 오래 예비되었던 몇 줄을 기어이 눈에 담았을 때는 올 놈이 왔구나 싶은 감상밖에는 일지 않았다. 곧 지긋지긋한 것들에 마침표가 찍힌다. 마법 같은 건 쓸 줄 모른다는데 도대체 뭘 어쩔 거야? 머리가 아무리 좋아 본들 인간을 주판으로 쓰려면 입이든 손이든 달려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런 다음에는 코끝으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생각은 자기위안일 뿐이라는 걸 알아서 그랬다. 전생의 가장 대비하고 싶었던 마지막은 편지로 찾아와 주지 않았고, 차라리 끝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숱한 것들은 그냥 징검돌일 때가 많았다.
ㅤ마법사로 살고 싶지 않았다. 신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를 따르는지 어쩌는지는 스스로 정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거대한 절망만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게 뻔했다. 정말로 세상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의 멸망을 느꼈으니까. 살카이안은 여덟 명의 '그들'로는 역부족이었던 일이 서른 명이 됐다고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실패한다면 오십 명쯤으로 늘려서 한 번 더 도전하면 될 문제일까? 그런 것이었다면 여덟이었던 역사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변덕으로 결말을 바꾸고 싶어진 거라면 넉넉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었을 테니 여덟을 서른으로 늘리는 일에만도 어떠한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해야 마땅했다. 이를테면, 년 단위로 빨라진 결절의 접근이라거나…. 세상의 짜임새를 이해하는 서른 명의 마법사들, 이치를 부정하여 새로 쓰는 기적을 다루는 자들. 그 사실에서 출발한다면 마법만이 막아낼 수 있는 결절이야말로 세상의 이치이자 도리다. 스스로 만든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고 다시 쓰면 그만일진대 구태여 진짜 낫이나 횃불을 들 수 있는 체스말을 만들어 놓고 도장까지 찍어다 기념해 두는 심리 같은 건 솔직히 짐작도 가지 않았으므로, 극히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모든 난리통은 아무래도 베로샤의 도박인 게 틀림없었다. 신은 자신이 만든 세계의 통제권을 잃고 만 것일 테다. 그리고 살카이안은 신조차도 결과를 장담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과업에 내던져진 인간이 되어 운명을 받드는 대신 멸망 후의 활자로나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덮은 하얀 장갑을 벗겨내며 생각했다. 베로샤, 당신의 인도에는 의지가 있습니까.
ㅤ차라리 신에게 마음이 없다면 어떨까. 서른 명의 돌연변이들이 생겨난 것마저 이치의 한 구석일지도 모른다. 해가 오르면 떨어지고 눈을 뜨면 잠들 수밖에 없듯 필요 최소한의 효율을 따라 적당한 재목이 선정된 결과였다고 생각하지 못할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에게 세상을 향한 뜻과 애착과 집착이 있다면, 안배된 삶이 사실은 도박조차 되지 못하는지 알 게 뭔가. 살카이안은 어느 쪽이든 싫었다. 당연하게 세상을 구하고 싶지 않았고, 당연하게 폭죽이 되고 싶지 않았다. 부품도 싫었고 장난감도 싫었다. 가장 놓고 싶지 않았던 삶을 놓았으니 그건 운명이 아닌 우연이어야 했다. 그 순간의 결심이 여전히 박동만큼이나 선명했다. 이 열 뻗치는 형제들은 내내 놀기만 했던 동생이 하는 소리는 귓등으로도 들어주지 않는구만. 결절 따위가 다 뭐라고. 여기서 살아 나가서 내가 대공이 되어 확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들 테다.
ㅤ차라리 꺾이고 굽히는 게 마음편할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살카이안은 자신이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오른쪽 어깨가 결절에 닿기 직전의 그 한순간에 스친 것은 주마등이 아니라 울화였다. 그는 너무도 삶을 사는 자였으므로 죽을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었다. 그의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살카이안 클라셰트는 한 번의 시간을 온전히 돌이켰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는 죽음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들어 본 적 있을지언정 죽어 본 적 없다.
ㅤ육 년의 시간은 끔찍하게 힘이 강했다. 시선이 높아졌으니 같은 방의 풍경에 낯선 마음이라도 들어야 마땅한데도 그렇지 않았다. 첫날과는 도무지 같다고 할 수 없는 어설픈 침묵 속에서는 활을 들고 싶지 않았다. 제 뜻 밖의 소리를 전부 지워 버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 무심코 이야기를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아서, 손 안에 쥔 것이 있으면 휘두르고 싶을까 봐서. 그런데도 움켜쥐는 것에 게으를 수 없었다. 정적 속에서도 예리한 음이 귓가를 찌르고, 심장을 관통하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지배하게 두면, 그곳에서 언어가 태어난다. 그만, 그런 건 됐어. 지금은 아니야, 조금만 더. 손을 뻗지 마. 소리지르지 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끌리지 않겠다고, 또다시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나뿐이고말고. 눈을 감고 십오 초 동안은 같은 세계다. 바뀌는 바가 없으나 겪은 적 없는, 같은 생에서 눈을 뜬다. 팔천 번의 마법, 그만큼 부정을 쌓아올렸으면, 들을 때도 되었는데. 그래, 분명 정말로 머지않았다고, 스스로에게….
ㅤ시선을 보낸다.
ㅤ선생님은 불안하지 않으세요?
ㅤ우리가 어디까지 사람 아닐 수 있을지?
ㅤ그것이 어디까지 평범해질 수 있을지?
ㅤ저는 놓쳐 버린 제가, 돌아가지 못하는 제가, 그냥 손에 잡히는 저 자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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