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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카이안 클라셰트의 새해는 조용히 왔다. 17년 동안은. 두터운 방문이 빡 소리와 함께 둔중하고 호쾌하게 열렸다.

 "메이플!!!"
 "뭐야?!!"
 "술 마시자!"

 뭐야?

 "무, 무슨 소리야 미성년자 성녀님이 남의 집에서 야심한 밤에 그런 말을 크게 해도 되는 아!"
 "그래!!"
 "아―!!"

 미성년자가 아니다! 살카이안은 벌떡 일어났다. 딱 침의와 실내복의 중간쯤에 걸친 제 복장에 놀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당장 달려온 쪽도 딱히 이제부터 술상을 차려보자는 차림이 아닌 건 마찬가지였다. 새해가 왔다. 방학은 짧으니 잠깐 쉬는 시늉만 하다 다시 마차를 타게 될 것이고 돌아가면 시작이라기보다는 끝이 날 분위기겠지, 그런 생각이나 하다가 머리에 벼락을 맞고 그 길로 뛰어온 게 분명했다. 살카이안은 입을 떡 벌린 채 예의상 시계를 확인했다. 솔직히 시간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이 귀한 날을 너무 풋내나게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살카이안 클라셰트 18세는 이미 변덕마저 잊고 얌전에 길들여진 도련님이었고 입이 먼저 얼을 탔다. 

 "그… 그래도 돼?"
 "그럼 안 돼?"
 "되 되지? 근데 너 잘 잘 마셔?"
 "맥주? 와인? 몇 병은 마실걸? 너는?"
 "나, 난 두 잔 마시면 취해."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그럼 남은 술은 누구랑 같이 마셔?!"
 "보관해 놨다가 나중에 마시면 되지."
 "기분이 다르잖아 기분이. 애당초 처음 마셔보는 녀석이 어떻게 주량을 알아?"

 몸을 갈아끼웠다는 녀석이야말로 주량 같은 건 어떻게 아냐? 물론 주량이야 한 잔이 됐든 한 모금이 됐든 나이가 찰 때까지 우직하게 정직했던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도리어 대답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었고, 살카이안은 낯선 기분에 삐걱거리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삼 초쯤 되는 침묵이 지나갔다. 

 "마엘린느!!"

 둘은 동시에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곧장 발을 움직이려는데 호제타가 살카이안을 만류했다. 나, 마엘린느의 방으로. 너, 알아서 챙겨 와. 옷도 갈아입고. 집합은 10분 후 2층 소응접실에서. 고작 그 시간을 가지고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살카이안은 비장한 얼굴로 무턱대고 끄덕거렸다. 당당한 적법 성년들이 일사불란하게 복도를 달렸다.

 


 "술 마셔 본 적 없는데…."

 늦은 밤이었지만, 손끝의 잉크자국으로 보면 아무래도 잘 생각이 없었던 듯한 마엘린느도 갑작스러운 소란이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너 지금 '좋긴 한데 얘네가 왜 이렇게까지 다급한지 당황스럽고 아무래도 똑같이 반응하기는 무리지만 확실히 기대는 큰' 얼굴이야, 마엘린느."
 "……."
 "이번에는 '내가 그런 얼굴이라고?'가 됐고."
 "……."

 발을 모아 앉은 고양이처럼 눈만 굴리는 마엘린느를 살카이안이 점점 할 말 없게 만드는 사이, 티 테이블은 새로운 쓰임을 멋지게 소화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열두 가지 치즈 플래터와 바질을 넉넉하게 끼운 토마토 카프레제는 물론이고 꽃 모양으로 장식된 슬라이스 햄과 동그란 살라미도 한 접시 올라가니 와인 병을 둘 장소만이 간신히 남았다. 잔은 각자 드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마시면 늘어."
 "너 지금 대사에 고삐가 없다."

 잘 마시는 사람의 특권 같은 호제타의 말에 짧은 응수가 돌아간 것을 마지막으로 세 사람의 잔에 모두 와인이 찼다.

 "흠흠, 역사적인, 쨍! 건배사……." 호록 냠

 뭔가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고 분위기를 잡으려는데, 하필 잔을 들고 있었던 탓인지 그놈의 건배는 순식간에 끝났다. 호제타는 한 번에 잔을 반쯤 비워 버렸고, 마엘린느는 어쩌다 덩달아 한 모금 삼키고서 오묘한 표정으로 절인 올리브에 터키 햄을 잽싸게 말아 꽂고 있었다. 개인 접시 같은 걸 올리려면 사이드 테이블이라도 끌어오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려는 참인데 흰 빵 두 조각이 이미 반쯤 접시 역할을 하고 있는 걸 깨달은 것도 동시였다.

 "아차." 꼴깍
 "뭔가 해?"
 "아니, 뭐, 잘 마시면 됐지…. 마실 만 하냐?"

 반응으로 점치기에 아무래도 '엄밀히 따졌을 때의 음주경험'조차 없는 듯한 마엘린느에게 그렇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해가 갈수록 길쭉한 대답을 기대하기보다는 눈을 들여다보는 게 빠른 사람이 되고 있기도 했다. 정말 집고양이가 다 됐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리 좋은 뜻으로 쓴들 반길 듯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므로 살카이안은 그 감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달고, 셔. …매운가? …더 마셔 볼래. 이거 맛있다."

 말은 저래도 펜만 쥐여 준다면 감상으로 한 바닥쯤 채우는 건 일도 아니겠지. 아마 맛에 대한 것만은 아닐 테고 거기에 이런저런 서술이 더해지다가 평소 하고 싶어하던 말들이 달팽이 고개 내밀듯이 스르륵 등장할 터였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이야기의 서문이 되어 버리는 일도 어쩌면….

 "너는 안 마셔?"
 "이 몸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건배사 생각하다가 그만?"

 대꾸하며 잔을 입에 가져가자 뭔가 이어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 호제타가 입을 다물었다. 뭐야, 구경 났어. 정작 맞이하니 한순간에 대수롭지 않아진 날에 긴장을 툭 내려놓은 채, 살카이안은 향을 음미하는 일도 잊고 한 모금 삼켰다.

 "……."

 웬걸,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엘린느의 감상은 아주 직관적이고 정확했다. 달고 시고 매웠다. 사용인들끼리 잔을 부딪히는 순간에 난입해 고개를 열심히 숙여가면서 뭘 가져왔는지도 모르고 챙긴 와인은 신년 밤에 아쉽지 않을 만큼은 좋은 것이었지만 딱히 여는 것도 손이 떨릴 만한 고급품은 아니었다. 한 모금만으로도 황홀해지는 액체가 아닌 것은 그 탓일까? 물론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나란히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이번에는 카프레제를 요령 좋게 한 입에 넣은 마엘린느가 눈을 깜박거렸다. 살카이안은 그 얼굴을 '그 호들갑을 떨어 놓고서 부잣집 도련님처럼 이 맛이 아니라고 하려는 셈인가' 싶은 표정이라고 해석하고 슬쩍 눈을 피했다. 붉은 왁스로 동그랗게 밀봉한 치즈를 하나 까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맛있지만, 아무것도 아니네.

 "맥주는 없나 물어보고 올까? 있을 텐데."
 "나 여러 종류 동시에 마시면 앓아누워."

 전적이 있는 듯한 대답이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언제든 발뺌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므로 살카이안은 구태여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짧게 한숨, 그리고 한 모금 더. 그러는 동안에는 음악도 없었고 봄바람도 없었다. 창문 바깥으로 종이 울리지도 않았고 전율 같은 감각이 달려오르지도 않았다. 대단한 소란이나 고백해야 마땅할 커다란 만족감 따위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또 한 가지 되돌아온 건 좋았지만 그냥 벽난로가 타고 있을 뿐이었다.

 세 모금째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살카이안은 떠올렸다. 이전 생의 그는 누군가와 함께 잔을 기울인 적이 손에 꼽았다. 입이 까다로운 건 둘째치고 결국 그래서 그리 즐기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왜 다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애타게 기다려졌을까, 생각한다면, 또 쉽게 답이 나왔다.

 자신은 어쩌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겪어서도 안 된다. 답을 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새로운 답을 낼 수밖에. 오늘 밤은 지겨울 만큼 생각하고 한탄스러울 만큼 겪는 거야. 세계를 부정하려면 세계를 직시해야 해. 죽은 듯이 살려면 산다는 게 뭔지는 알아야지.

 "…하지만 새해 첫날의 멀쩡한 몸이 준비된 채로 기다리고 있는데 앓아눕히지 않으면 실례지? 맥주를 마시든 사과주를 마시든 일단 눈앞의 포도주에게 예의를 차리자고. 너희, 잔 이리 내밀어 봐."

 갑자기 흥이 오른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살카이안 클라셰트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제각각 다르게 빈 와인잔을 채우고, 이번에는 살짝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고 눈을 휘면서 마땅하게 손을 내밀었다.

 "막 태어난 술꾼들을 위하여."

 또 한 번의 생이 있다면 그때는 마시는 걸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쨍!


She took Jamie as a chaser, Jack for the fun
She got Arthur on the table with Johnny riding a shotgun
Chatted some more, one more drink at the bar
Then put Van on the jukebox, got up to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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